|
언제 무례하여 무례해지는가?
문화와 하위문화 너머의 공손성
When Is It Rude To Be Rude? - Politeness Across Cultures and Subcultures
Thorold (Thor) May (성심외국어대학 영어과)
South Korea 2001
Professor KANG Uk-ky, whose enquiry first gave rise to this (very anecdotal) study, has provided the Korean language translation here. The original English language version is online at http://thormay.net/koreadiary/politeness.html
(이 글은 모든 인간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필자가 현재 일하고 있는 한국에서 많은 예를 들었다)
Abstract: This paper deals with politeness phenomena which are general to all human societies, but draws many examples from Korea as understood by the writer (who is Australian). The emphasis in this analysis is on the problem of decoding politeness. It is noted that even within a culture, politeness signals can be manipulated, and that interlocutors calibrate their meaning according to knowledge of individual personalities. In Korean society, the requirement for formal politeness signals is very strong, both in body language and in fixed linguistic markers (such as verb endings). However, the pragmatic meaning of these signals is calibrated in ways that are difficult for foreigners to decode. The paper also considers the dilemma of that minority of Koreans who attempt to interact within the linguistic and social codes of English. It is noted that these attempts often go astray, both because the speaker misunderstands English politeness coding conventions and because listeners in English, almost by definition, come from radically different cultural backgrounds to the Korean.
공손성의 기저원칙은 타인의 감정을 위해 호의와 배려를 보임으로써 조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는 화자가 공손하거나 공손하지 않기를 시도하는 것을 알리기 위한 어떤 메카니즘을 발전시켜왔다.
어떤 상황에서 의도된 공손성을 해독하는 것은, 공손성을 나타내는 표준 메카니즘 자체들이 화자에 의해 조작되고 청자에 의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복잡하다. 예를들어, 한국어에서는 화자가 각 문장에서 어떤 수준의 형식적 공손성을 표시하도록 요청된다. 그러나, 화자가 명백하게 '공손한' 언어표지를 사용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반드시 그가 공손성이나 무례성을 의도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의 사용은 전적으로 관습적일 수 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습관적으로 '공손한' 언어표지를 더 사용하거나 덜 사용한다. 그런 사람들을 알게되면,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따라 조정하여 해석한다.
어떤 까다로운 노인이 아는 이들에게는 친절하고 호의를 가진 사람으로 이해되더라도, 외부인에게는 무례하게 보일 수 있다. 몇해전, 나는 8개월 동안 부두노동자로 일하였는데, 이들의 언어는 외부인에게 매우 비속하고 거칠고 무례하게 보였다. 그런데 내가 그들을 알게 되자, 대부분은 그들 집단의 규범내에서 대학교수들보다 더도 덜도 무례하지 않았다.
문화를 통한 처신, '실제적' 공손성의 해석 - 즉, 단순한 형식(관습적 신호)이 아닌 기저 실체-은 매우 어렵다. 이것은 각 대화자가 지닌 문화적 전제가 극단적으로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악'. '정직/부정직', '공정/불공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다른 많은 도덕적 축들은 서로 매우 상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문화의 남자가 다른 문화의 여성에게 하는 문화적 신호가 간섭적이고, 거칠고, 위선적인 등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은 언어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연구해왔다. Coulmas(1981:8)는, "많은 관례, 특히 공손성 관례들은 단어 의미 자체에만 바탕을 둔, 문화적 습관, 관습, 태도 등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해석을 거부한다."고 말하였다. 사실, 관례의 단순한 해석은 원어민 수준의 언어수행에 충분치 않다. 이런 표현들의 많은 것은 대화 교환과 관계있기 때문에, 그것의 조작은 힘의 관계, 연대성과 다른 사회적 유통에서 하나의 도구이다(Tannen & Oztek, 1981 : 461).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유능하고 능통하게 한국어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어를 제 2언어로 말하는 소수의 선택된 한국인 집단과 구두로 의사소통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한국의 일반대중과는 보다 우연적이고 일상적 생활에서, 주로 몸짓언어와 그들의 행동의 결과를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예를 들어, 수퍼마켓의 줄에서 서양인은 앞에서 뒤로 밀려고 하는 여성을 몸으로 막으려고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짓언어는 도전, 경멸을 나타낼 것이다. 한국인 여성이 이 일에 부여하는 의미를 그 서양인은 아마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나타내는 몸짓언어는 외국인들이 공손성에 대한 기대를 재조정하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호주에서 친구나 이방인에게 절을 하면, 내 행동은 풍자적이거나 유머러스하게만 해석될 것이다. 반대로, 한국인 남성사이에 절을 하지 않으면, 뜻있는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한국에서 절은 너무나 정상적이기 때문에 행위 그 자체는 진정한 존경이나 공손성을 표시하는 힘을 나타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의 한 예를 들겠다. 성심외국어대학 학생들은 교수들에게 인사하는 일에 매우 잘 훈련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층위 -형식층위- 에서 매우 공손하다. 그런데 실제층위 또는 내면적 의도에서, 이것이 항상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지난주 내가 맡은 반들 중 한 반의 대표는 모든 형태의 존경에서 특히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수업시작 10분후 그의 휴대폰이 울리자, 그는 응답하였고 시끄럽게 수업을 방해하더니 나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선 '절을 하면서'나가자, 그의 파트너가 뒤를 따랐다.
내가 사는 반송동에서 가장 큰 수퍼마켓인 아람마트는 공손성의 형식들이 충돌하는 듯 하는 또 다른 장소이다. 경영자는 분명히 직원들에게 고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교육을 시킨 것 같았다. 솔직히 적어도 외국인에게는, 죽은 고기같은 눈으로 그들의 일상 과정을 되풀이하는 이런 기계적 인형들을 보는 것은 피곤하다. 그들은 고객에게 실제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전혀 미소짓거나 아는체 하지 않는다. 검색 카운터에서는 고객이 식품을 슬쩍하는데도 그들은 팔장을 끼고 서있다.(호주에서라면, 그들은 즉시 해고될 것이다.) 다른 말로하자면, 이 환경에서 공손성 형식은 허위이다. 그런 예절은 좋지도 않다.
보통 외국인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소수의 한국인들은 물론 외국인들에 의해 가장 잘 오해될 수 있는 한국인들이다. 그들의 임무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국외자들의 언어부호를 사용하면서 그들은 묵시적으로 이 외국인들의 문화적 규범에 따라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렇게 그들의 영어발화가 대부분 영어화자들에게 해독될 것이다.(드물지 않게 '영어화자'가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중국인이나 방글라데시인이다.)
영어를 하는 한국인들 중 가장 유창한 사람들은 영어권에서 얼마간 살았을 것이다. 그들의 동포에게 그들은 방문한 국가의 언어적, 문화적 규범에서 전문가들로 간주된다.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반대로, 한국에서 몇년을 보내고도 한국의 역사, 문화나 언어에 대해서 조금 밖에 모르는 외국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고국에 돌아가서-그들의 무지의 장소로 부터 몇천킬로 떨어진 곳에서, '전문가'인양 안전하게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외국 (피지, 파푸아 뉴기니,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많이 생활하였다.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현지관리와 교사들이 명백한 무례를 자주 저지르지 않았던 나라나 고용주는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이 사람들중 어떤 사람들은 의도나 형식 양쪽에서 무례하였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문화적과 언어적 신호를 잘못 사용하였다.
직장문화 자체는 나라마다 상당히 다르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기대되는 행동과 의사소통의 수용된 통로는 새로 도착한 이주자에게 신비한 미스테리 여행일 것이다. 경고없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고, 설명도 없이 요구되기도 한다. 한국인(다른나라의) 고용주의 명백한 불손성에 대해 외국인이 편집병에 걸리기는 쉽다. 다수의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는 기관에서 외부인들은 자연스럽게 경험을 공유하고 실제이상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있는 현지 고용주의 의도에 대해 평을 할 것이다. 새로운 외국인이 도착하면, 이 평은 그에게 전달될 것이고,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한국인들의 공손성과 다른 행동을 가늠하는 측도가 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흔히 (형식, 친밀성의 층위 등) 사용역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한 언어에 공손성과 같은 것에 대해 명시적 표지가 있을 때, 원어민들이 그것을 사용하는데 부여하는 실제적 의미는 항상 유동적이고 미묘하다. 예를 들어, 소위 경어표지에 관해 한국어나 일본어에 대한 책에서 개략적인 기술을 읽는 것에 비해, 이런 신호에 숙달되고 일상적인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게임이다.
공손성에 대한 통사적 표지들이 언어와 문화를 통하여 쉽게 유포되기 어렵지만, 공손성의 방식과 행동들이 요구하는 의미는 흔히 현지에 고유한 부대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기만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상기한 절의 관습을 보자. 이것은 (지금은 인지의 목례로 축소되었지만) 2세기전 허리를 굽히는 것을 포함한 관습이 있는 유럽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잘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언제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절하는지, 그리고 특별히 말하지 않은 의미를 위해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미묘한 한국식 에티켓을 알기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이것은 나의 추측이지만, 현지에서 항상 발전되고 있는 관용어들과 일치할 것이다)
형식의 언어적 지속성은 때때로 민족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Ferguson에서 처럼)(1981: 32) : "공손성 형식은 속담·수수께끼·자장가와 유사한 민속문학 종류이기 때문에, 일상적 스피치에서 사라진 고어적 형식과 구조를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공손성 형식의 확산일 것이다: Ferguson(1982: 32)에 의하면, "언어경계를 넘어 문화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확산하기 위해 공손성 형식의 구조와 사용을 위한 강한 풍조가 있다. 예를 들어, 아랍식 인사와 감사 형식은 이슬람과 함께 아랍어로 바뀌지 않은 언어공동체들에 보급되었다." Ferguson의 특정한 예들은 여기서 신중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 그가 언급하는 표현들은 거의 분명히 이슬람에서 아랍어의 특수한 양층언어적 역할에 편승하고 있다. "좋은 하루되세요(Have a nice day)" 등과 같은 최근 영어 예들은 미국의 상업적 제국주의와 함께 도처에 있는 할리우드의 산물들로 부터 나왔을 것이다.
제2언어로서 영어사용자들은 영어의 사용역·공손성·친밀성 표시 등을 통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사실, 영어에 유창한 많은 학습자들은 서투르게 다루는 양태동사들· 억양의 변화·(말하지 않아야 하는 곳에서) 과잉명시·다른 많은 유창한 사회언어학적 메카니즘 때문에, 사회적 폭행·사회적 위반을 하면서 지나가는 줄도 모른 채 행복하게 지낸다. 이런 것은 교실 교과서 환경에서 거의 취급되지 않으며, 계속 일상언어에서 변화되고 대부분의 원어민들이 명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L2화자에 의한 언어적 불손성은 다소간 불가피하다.
형식 오류들이 문화를 통해 불가피 하다면, 위반의 결과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공손성 표지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남용으로 야기된 반응은 개인, 사회계급과 모든 문화들 간에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리적이나 정치적으로 위협을 느꼈던 문화들은 공손성 형식이나 그들의 정체성의 다른 표지들에 매우 관심있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행동양식에서 중국인들보다 더 유교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중국 중부에서 2년간을 살았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체면을 유지하는)기분이라고 하는 것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같은 다른 도덕적 가치들 보다 공손성의 외적신호를 나타내는 것을 더 중시함을 의미할 수 있다.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서양인은 정직보다도 기분을 우선시하는 한국인(또는 누구든지)의 무례성에 매우 화가날 것이다. 즉 그는 바보로 취급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서양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근사하게 속였다고 느낄 것이다. 모든 문화에서, 소위 상층으로 이동하는 계급들은 형식의 위반에 대해 가장 비관용적인 경향이 있다. 하층이나 노동계급 사람들은 흔히 '상류사회'의 부정직한 위선으로 그들이 간주하는 것을 위반하면서 왜곡된 즐거움을 느낀다. (나의 가족은 노동자 계급이며, 나의 어린시절 추억은 이런 유형의 세련된 에티켓을 경멸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상류사회의 안전한 구성원들은 자기모멸적인 유머를 가지고 동료들의 매너를 볼만큼 안전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공손성의 '정확한'형식, 사회적 의례, 정치적 정확성,(예를 들어 여성의 패션) 옷 등에 자주 질투할 것이다. 나는 내 나라 호주로부터 많은 예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사려깊은 한국인 사회언어학자 누구라도 한국사회에서 풍부하게 예들을 발견하리라고 확신한다.
학창시절에 거친 욕설의 사용으로 유명한 부유한 사립학교 출신의 여대생들에 대한 심술궂은 논평이 생각난다. (그들은 부모들의 가치에 도전할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다). 작은 가게 주인이나 사무직원들의 딸들, 가족들중에서 처음 대학에 도달한 세대는 언어에 있어 훨씬 조심스러웠다. 1980년대 초에 언어학 강사로 호주의 욕설에 대해 내가 해온 일년간의 강의에 따르다보니 유사한 상이성에 부득이하게 직면했다.
사회적 변화의 강력한 압력을 경험하지 않고 있는 사회는 21세기 지구상에서 거의 없다.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중국은 모두 가치의 커다란 변화와 싸우고 있다.
2000학년도 동안, 내가 가르치고 있던 중국의 대학에서 130명 이상의 석·박사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나의 조사는 연령이나 의상, 힘 등 30 가지 요소들에 대해 공공연히 그들이 보여주도록 문화적으로 부추겨진다고 느꼈던 존중(존중의 결여)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사실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1에서 5까지 범위에서 표시하도록 요청받았다. 나는 아직 결과를 분석중인데, 그러나 이미 학생들간에 거의 모든 존중가치들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음 분명하다. 그들의 대답은 모든 곳에 걸쳐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가치들이 더 이상 고정적이지 않고 대부분 문화 구성원들이 이해하는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에 속하고 있다. 공손성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존중에 대한 그들의 견해만큼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1945년, 호주인구의 97%는 앵글로 셀트인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비교적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공손하기를 의도하는지 무례하기를 의도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오늘날 호주인구 40%는 아마도 200여개의 다른 문화적.언어적 배경을 가진 곳에서 왔을 것이다. 사회적 배경규칙들은 무엇에 대해 일반화하기에는 솔직히 매우 어렵다. 1971년 나는 런던에서 6개월 동안 일하였는데, 그곳도 압도적으로 앵글로 셀트사회였다. 그리고 나는 집단으로서 신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었다. 오늘날 런던시민 3명중 하나는 유색인이다. 이제 호주와 영국은 각자의 역사 교과서에서 찬양된 나라와 사람들과는 이제 매우 다른 나라이다. 나는 이런 변화를 아쉬워하지 않는다(물론 비록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만).
(여러 이유로) 이민을 받아들이는 다른 국가들은 두고라도, 호주와 영국과 중국에서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한 결과는, 공손성과 같은 가치를 위한 사회적. 언어적 표지들이 더 이상 그들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점이다. 그런 명제는 좁은 일상 과정속에서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나라의 매우 적은 구성원들만이 이 에세이에서 다룬 변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범문화적인 의사소통에서 그들의 일상적 타협에 대해 절반쯤 자각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들을 놀라게 했을 조정이다.
개인들은 동료 집단속에서 끊임없이 '가치의 파괴' 등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항상 기분이 상해지는 일은 생활에 쓸모있거나 만족스러운 방식이 아니다. 이런 사회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례함이나 공손성의 표시를 해석하는데 조심하도록 배우는 것은 일상적 사실이다. 그들은 언어의 관습적 형식과 행동에 초점을 두지 않고, 언어뒤에 있는 의도를 쁹도록 배운다. 외국인에게 이것은 때로 어렵지만 "행동은 말보다 크게 말한다"라는 엄지의 법칙으로 외국인의 단어의 진정한 의도를 조만간 보통 해독한다.
물론 형식은 여전히 어떤 영향을 가지지만 수용성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어떤 폭을 가지고 취급된다. 음주에서 한도내에서 자유가 허용되듯이, 앵글로 호주인은 레바논 식당에서 잘못된 의사소통을 참작할 것이다.
다문화국가의 주문화내에서, 모든 종류의 하위집단들은 공손성의 규범과 다른 금지들을 부과하려고 할 것이다. 이 하위집단들은 소득·교육·지리·인종·종교·어떤 조직의 회원 등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들의 집단내 행동이 무엇이든, 단원들은 공적담화에 개입하자말자, 예를 들어 - 길모퉁이 가게 방문 - 사회규칙들에 대한 모든 내기가 항상 가능하다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직장에서 경영진은 그들 회사의 '표준'을 고용인들에게 부과하려고 한다. 서양에서는 적어도 성적인 언어와 몸짓과 같은 이런 표준들이 법제화되었다. 이런 금지는 상당한 저항을 맞으나, (예를 들어) 많은 남자들은 직장에서 정상이라고 간주한 이런 언어들이 그 환경에서 여성에게 불손한 (법적으로 행동도 가능한)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많은 외국인 남선생들은 조국에서라면 심각한 직업적 충돌로 그들을 몰아넣게 될 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자국의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이용하여 불손함에 대한 커다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한국의 이문화 경험은 이민을 받아들이는 (카나다·호주·미국·서유럽국가들 등) 현대국가들과는 매우 다르다. 한국은 중국에서 처럼 문화혁명의 잘못 선도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한국은 군사적 충돌과 정복이라는 난폭한 경험을 하였지만, 이런 침략의 본질은 한국인들간에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금 한국은 무역국가이고 미군과 (영어교사 군단은 놓아두고도) '불법'공장노동자의 착취된 노동력인 지하노동자들이 있다. 이런 침략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한국인들의 핵심적 생활경험은 한국적인 것 둘레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거주 여느 호주인이나 미국인이 당연시하는 다른 문화집단의 애매한 신호를 해독해야하는 일상적인 압력은 없다.
방금 강조되었던 문화적 고립성 때문에, (적어도 서양인에게) 공손성의 언어적. 행동적 형식은 한국에서 기대되는 행동에서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고, 공손한 의도는 때로 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다.
이것은 상류계급과 노동계급 한국인들의 행동에서, 지역적으로 큰 차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무뚝뚝한 부산남자와 더 부드러운 서쪽지방의 덜 직선적 유형이 가장 유명하다.) 많은 예의바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투박하고 예절바른 행동을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많은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거칠지만 정직하고', 야만적인 일본인은 거짓가면을 쓰고 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이다.
나와 같은 이주자는 한국처럼 우연히 일하게 되는 나라에서 시민들의 선의와 악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외국인, 적어도 서양인들은 조국에서 하듯이, 한국인의 공손성과 불손성을 측정할 수 있게된다. 즉 형식자체보다 언어적 형식뒤에 있는 의도를 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그들에게 말하는 한국인들이 한국식 마음가짐으로 영어단어를 말하려고 애쓰는 것을 상기하면, 메세지뒤에 있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흔히 어려운 일이다.
가끔 행동과 언어를 일치시키는 일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직접적이고 용이하다. 몇주전 서울에서 이틀을 보내었다. 22년만에 첫 방문이었다. 소개받은 여관을 거리이름이라고는 거의 없는 도시에서 어떻게 쁹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탑골공원에 서있었다. 한 중년부인이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선 어리둥절하며 내 여행안내서를 보고나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그곳에 전화를 걸려고 하였다. 그 전화에 문제가 있자 그녀는 지나가던 남학생에게 즉시 다가가 그의 전화기로 전화하도록 말했다.
여관주인이 나를 찾으러 오겠다고 제의했으나 15분 동안 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 학생은 나와 함께 있었고 여인은 장사때문에 가야했지만 확인하려고 나중에 되돌아왔다. 이들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던 완전한 이방인들이었다.
탑골공원의 만남은 진정한 공손성이고, 이후 이틀동안 이런 유형의 자발적인 도움을 여러번 받았다. 부산에서 8개월 동안 사는 동안 어느 한 사람도 거리에서 나를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이것은 두 도시사이의 커다란 문화적 차이인가 아니면 서울에는 영어 사용에 확신있는 사람들이 평방미터당 더 많은 것인가?
몇달전 일어난 다른 사건이 있다. 외국인 교수들이 교수집무실에서 외부 연단에서 다른 교수들과 합류하기 위한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새학년도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한 입학식이었다. 갑자기 본부의 한 행정직원이 들어와서 큰소리로 "모두 나가(everyone get out)"라고 말했다. 놀라서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은 둔감함으로 유명했다. 우리는 처음에 이 건방진 사람의 발목을 잡아 5층 창문에서 매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예법에 그러한 공격을 의도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L2 화자사이에 매우 흔한) 영어 양태동사 사용에 문제가 있었다. 잠시후 우리는 연단으로 향하였다.
그러면, 언제 무례하여 무례해지는가? 요약하면, 안정된 공동체들은 그들 구성원들의 공손성 의도를 표시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언어적과 행동적 형식을 발전시킨다. 이것은 공손성이 집단내에서 조화와 친선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메카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견가능한 형식은 창조적인 언어보다도 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손성 형식의 기본적인 조화는 오래되거나 새로운 요소들에 의해 침식당한다.
먼저 (인간의 모든 창조물과 같이) 공손성 형식은 개인적 이익을 위해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을 고갈시키고 문화구성원들이 보다 창조적인 언어로 기본적 형식적 신호를 강조하도록 표준화되고, 유행하는 표현들이 생기고 외부인들은 그들의 신임장을 받기위해 허둥댄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년남자가 힙을 노래하고 그의 십대 아들의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애쓰는 슬픈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계의 사회적 변화, 국경안과 국경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과 고용의 국제화는, 사회적 조화의 보존을 더욱 중요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다. 형식적 공손성에 바탕을 둔 전통적 의존도 존속하고 있으나, 전통적 사회에서 형식의 위반에 뒤따랐을 재빠른 처벌은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상호간 안녕을 바란다. 그러나 상대방이 등뒤에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지 총을 가지고 있는지 보기위해 악수를 할 때 마다 잠시 멈칫한다.
References and Bibliography
Brown P & Levinson S 1978 "Universals in language usage: Politeness phenomena", in Goody E (ed.) Questions and Politeness. London: C.U.P.
Charles Ferguson 1981 "The Structure and Use of Politeness Formulas", in Coulmas F 1981; also in Language in Society 1976 5:137-151
Coulmas F 1979 "On the sociolinguistic relevance of routine formulae", Journal of Pragmatics 33:239-266
Coulmas F 1981 "Poison to you soul. Thanks and apologies contrastively viewed", in Coulmas F 1981:69
Coulmas F (ed.) 1981 Conversational Routine. Explorations in Standardized Communication Situations and Prepatterned Speech, The Hague: Mouton
Erbaugh, Mary S. (2008) "China Expands its courtesy saying, "Hello", to stranger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67,No.2 (May) 2008:621–652. Online at http://online.wsj.com/public/resources/documents/chinaexpandsitscourtesy06102008.pdf [this is a very excellent analysis of courtesy language as a marker of social change]
House J & Kasper G 1981 "Politeness markers in English and German", in Coulmas F 1981:157-1
Tannen D & Oztek P 1981 "Health to our mouths! Formulaic expressions in Turkish and Greek" in Coulmas F 1981:37; reprinted from the Proceedings of the 3rd annual meeting of the Berkley Linguistics Society; pp.516-34
Other articles by Thor May dealing informally with cross-cultural issues are located on his main website at http://thormay.net : "Cultural Operating Systems - Thoughts on Designing Cultures", 2010; Ethnicity and Racism - Stirring the Pot, 2005;"Senate Inquiry into the Status of Australian Expatriates", 2004; "Korean, American and Other Strange Habits - You Do It Your Way - two books reviewed", 2003; Individualism or the Group",2001; "The Price of Freedom - an Escape from Vietnam", 1984
Bio: Thor May has been teaching English to non-native speakers, and lecturing linguistics, since 1976. This work has taken him to seven countries in Oceania and East Asia, mostly with tertiary students, but with a couple of detours to teach secondary students and young children. He has trained teachers in Australia, Fiji and South Korea. The present paper was written in South Korea. Thor's PhD is on language teaching productivity. Many of his papers, essays and stories may be seen on his website at http://thormay.net ; e-mail thormay@yahoo.com. A number of these papers are also on his http://academia.edu website at http://independent.academia.edu/ThorMay
Professor KANG Uk-ky, at the time of writing, was a faculty member of Sungsim College of Foreign Languages, Busan, South Korea. Sungsim College is now a campus of Youngsan University.
When Is It Rude To Be Rude?
Politeness Across Cultures and Subcultures
언제 무례하여 무례해지는가?
copyrighted © Thorold (Thor) May 2001
all rights reserved, http://.thormay.net
thormay@yahoo.com